김상훈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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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상훈은 1977년생으로,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 고졸 우선 지명되어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야구 선수이다. 2000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2014년 은퇴할 때까지 KIA 타이거즈에서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2002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하여 병역 특례를 받았으며, 2009년에는 한국시리즈 우승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 연수를 거쳐 KIA 타이거즈 코치로 활동하다가 2024년부터 전력분석 코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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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197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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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명 | 김상훈 |
영어 표기 | Kim Sang-Hoon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
생년월일 | 1977년 10월 27일 |
신장 | 180cm |
체중 | 84kg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연도 | 1996년 |
드래프트 순위 | 고졸 우선 지명 (2000년 입단) |
첫 출장 | 2000년 4월 5일 |
마지막 출장 | 2014년 4월 12일 |
등번호 | 77 |
선수 경력 | |
선수 | 광주제일고등학교 고려대학교 해태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2000-2014) |
지도자 경력 | |
지도자 | KIA 타이거즈 (2015-2023, 2024) |
대표팀 경력 | |
국가대표 | 2002년 아시안 게임 부산 1998년 야구 월드컵 이탈리아 |
수상 | |
수상 내역 | 2009년 KBO 리그 골든글러브 |
2. 선수 시절
1996년 서재응과 함께 고졸우선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지명된 뒤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대학 시절 국가대표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1] 1996년 1차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하지 않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1]
2000년에 입단하였다. 2007년까지 주전 포수를 맡았다. 2001년에 127경기에 출전하며, 같은 해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이 바뀐 팀의 주전 포수가 되어 오랫동안 활약을 이어갔다.[3] 2002년 아시안 게임에는 약물 복용으로 이탈한 진갑용을 대신해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 특례를 받았다. 2008년 4월 10일 SK 와이번스전에서 홈으로 쇄도하다 상대 팀 포수와 부딪혀 왼 발목 인대와 종아리 손상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했고, 8년 만에 출전 경기 수가 100경기를 밑돌았으며, 자기 최저인 35경기 출전에 그쳤다.[3] 2009년에는 주전 포수로 부활하여, 승부 근성이 강한 타격으로 자기 최다 시즌 12홈런, 65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12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개인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4] 이후 FA를 선언했고, 계약금 8억원, 연봉 2억 2,500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FA를 선언한 선수 중 제일 처음 계약을 체결했다.[4] 2011년 이후에는 차일목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하는 일이 눈에 띄게 늘었다. 2014년에 유동훈과 함께 은퇴했다.[1]
2. 1. 아마추어 시절
1996년 서재응과 함께 고졸우선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지명된 뒤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대학 시절 국가대표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1] 1996년 1차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하지 않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1]2. 2.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시절
2000년에 입단하였다. 2007년까지 주전 포수를 맡았다. 2001년에 127경기에 출전하며, 같은 해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이 바뀐 팀의 주전 포수가 되어 오랫동안 활약을 이어갔다.[3] 2002년 아시안 게임에는 약물 복용으로 이탈한 진갑용을 대신해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 특례를 받았다. 2008년 4월 10일 SK 와이번스전에서 홈으로 쇄도하다 상대 팀 포수와 부딪혀 왼 발목 인대와 종아리 손상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했고, 8년 만에 출전 경기 수가 100경기를 밑돌았으며, 자기 최저인 35경기 출전에 그쳤다.[3] 2009년에는 주전 포수로 부활하여, 승부 근성이 강한 타격으로 자기 최다 시즌 12홈런, 65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12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개인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4] 이후 FA를 선언했고, 계약금 8억원, 연봉 2억 2,500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FA를 선언한 선수 중 제일 처음 계약을 체결했다.[4] 2011년 이후에는 차일목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하는 일이 눈에 띄게 늘었다. 2014년에 유동훈과 함께 은퇴했다.[1]3. 은퇴 이후
2014년에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유동훈과 함께 볼티모어 오리올스,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돌아왔다.[1]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 코치였던 김지훈이 스카우트 팀장이 되며 2군 배터리코치로 임명됐고, 2018년부터 1군 배터리코치로 활동했다.[1] 2024년부터는 KIA 타이거즈의 전력분석 코치가 되어 선수 지도는 하지 않는다.[1]
4. 출신 학교
5. 통산 기록
실패
기아